예전에는 동네마다 목욕탕이 하나씩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걷다 보면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입구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목욕탕’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주말 아침이면 수건과 때수건, 세면도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가족이 함께 집을 나서곤 했다. 오늘은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이유와 달라진 우리의 목욕 문화에 대해 알아 보겠다.
요즘에도 동네 목욕탕은 남아 있다. 다만 예전처럼 조금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생활시설은 아니다. 2025년 전국 목욕장업 영업소는 5,656곳으로, 2000년 8,904곳보다 36.5% 감소했다. 서울은 감소 폭이 더 커 1995년 1,764곳에서 2025년 510곳으로 줄었다. 이제 동네 목욕탕은 익숙한 일상 공간보다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씻는 곳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집마다 욕실이 갖춰지기 전 목욕탕은 생활에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평소에는 세수와 간단한 씻기로 지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는 집이 많았다. 그래서 “목욕 가는 날”은 가족의 정기적인 일정처럼 여겨졌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와 소리가 있었다. 뜨거운 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 바가지 부딪히는 소리, 탕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뒤섞였다. 뜨거운 탕과 미지근한 탕을 오가고,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목욕을 마친 뒤의 시간도 빼놓을 수 없다. 몸을 말리고 선풍기 앞에 앉아 바나나우유나 커피우유를 마셨다. 어른들은 평상이나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아이들은 동전을 받아 음료수와 간식을 골랐다.
동네 목욕탕은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시장에서 마주치면 짧게 인사하던 이웃도 탕 안에서는 가족 이야기와 동네 소식을 주고받았다. 자주 오는 사람이 며칠 보이지 않으면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주인 역시 손님의 얼굴과 생활을 알고 있었다. 외상으로 목욕비를 받거나 아이를 잠깐 살펴주고, 명절이면 서로 음식을 나누는 곳도 있었다. 목욕탕은 씻는 공간이면서 동네 사람들의 느슨한 관계가 유지되는 장소였던 셈이다.
집 안 욕실과 새로운 여가시설이 목욕탕을 대신했다
동네 목욕탕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주거환경의 변화다. 아파트와 새 주택에 욕실과 온수 설비가 보편화되면서 굳이 밖으로 나가 목욕할 필요가 줄었다. 샤워기를 틀면 원하는 시간에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공간을 함께 쓰지 않아도 된다.
생활시간도 달라졌다. 가족이 함께 쉬는 날 목욕탕에 가던 방식보다 출근과 등교 전 짧게 샤워하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젊은 세대에게 목욕은 반나절을 보내는 행사가 아니라 매일 빠르게 해결하는 개인적인 일이 되었다.
사우나와 찜질방, 스파, 헬스장 같은 새로운 시설도 등장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곳보다 운동과 식사, 휴식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동네 목욕탕은 넓고 화려한 시설과 경쟁하기 어려웠다.
운영비 부담도 커졌다. 목욕탕은 많은 양의 물을 데우고 실내 온도를 유지해야 하므로 연료비와 수도요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여기에 인건비와 수선비까지 오르면서 손님이 줄어든 영세 목욕탕은 버티기 어려워졌다. 최근에도 에너지 가격과 이용객 감소가 폐업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목욕탕 운영 현실
시설을 새롭게 고치는 일도 쉽지 않다. 오래된 배관과 보일러, 타일, 환기시설을 한꺼번에 바꾸려면 큰 비용이 든다. 그렇다고 수리를 미루면 낡고 불편하다는 인상을 주어 젊은 손님이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생긴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의 땅값과 임대료가 오른 것도 영향을 미쳤다.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목욕탕보다 건물과 상가, 주택으로 개발하는 편이 경제적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인이 은퇴한 뒤 사업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지 못해 문을 닫기도 한다.
사라지고 나서야 목욕탕의 역할이 보인다
집에서 편하게 씻을 수 있으니 동네 목욕탕이 없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집에서 충분한 온수와 목욕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주택에 사는 사람과 홀로 지내는 어르신,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민에게 목욕탕은 여전히 필요한 생활시설이다.
특히 작은 지역에서 유일한 목욕탕이 문을 닫으면 주민은 목욕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운전하기 어렵거나 대중교통이 불편한 어르신에게는 큰 부담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공공목욕탕을 운영하거나 목욕 이용권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공백 때문이다.
남아 있는 목욕탕 가운데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남는 곳도 있다. 오래된 타일과 간판을 그대로 살려 젊은 세대가 찾는 공간으로 바꾸거나, 작은 사우나와 휴게공간을 더해 단골을 모은다. 목욕탕의 옛 분위기를 좋아해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로만 남는 것과 주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목욕탕으로 유지되는 것은 다르다. 동네 목욕탕의 진짜 가치는 화려한 인테리어보다 가까운 곳에서 부담 없이 몸을 씻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목욕탕에서는 사람의 직업과 형편을 겉모습으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옷을 벗고 같은 탕에 앉아 있으면 모두 비슷한 동네 사람이 되었다. 서로 등을 밀어주던 행동에는 지금보다 가까웠던 이웃 관계도 담겨 있었다.
물론 과거의 목욕탕이 모두 따뜻하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위생 상태와 사생활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한 운영자와 노동자의 고생도 컸다. 그럼에도 목욕탕은 한 시대의 주거환경과 가족문화, 동네 관계를 보여주는 생활공간이었다.
요즘도 목욕탕은 있다. 다만 더 이상 어느 동네에서나 당연히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간판이 내려가고 그 자리에 카페나 빌라가 들어선 뒤에야 그곳이 주민들의 일상을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사라지는 동네 목욕탕을 기록하는 일은 오래된 건물 하나를 추억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목욕 가방을 들고 골목을 걷던 사람들, 뜨거운 탕에서 오가던 이야기, 목욕 후 마시던 차가운 우유까지 함께 기록하는 일이다. 목욕탕은 줄어들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어졌던 생활문화는 기억할 만한 동네의 역사로 남아 있다.